⑮ pity, symphathy, empathy, compassion의 차이를 알고 밀려 온 부끄러움
여러분은 Pity, Sympathy, Empathy, Compassion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는가?
나는 직업상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할 수밖에 없어서, 남들보다 좀 더 깊게 영어 단어의 의미를 공부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연민', '불쌍함', '동정', '측은지심' 등에 해당하는 이 네 단어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사실 나는 영어가 장사를 할 때는 무척 유용하지만, 깊이 있는 사고를 할 때는 적합하지 않은 언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네 단어의 차이를 깨닫고 나서, 영어에 대한 그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 이 네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면 여러분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네 단어를 가르는 두 가지 기준
네 단어를 가르는 기준은 아래와 같이 딱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상대방의 고통을 내 몸으로 느끼는가?
내 몸으로 느끼지 못하면 pity, sympathy이고, 상대방의 고통이 내 몸의 고통처럼 느껴지면 empathy, compassion이 된다.
둘째, 그 고통이 해결될 때까지 실질적인 노력을 지속하는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empathy이고, 그런 노력을 하면 compassion이 된다.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단어 하나씩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다시 설명해보겠다.
Pity — 안됐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Pity는 타인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 마음 속에는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문장 하나가 숨어 있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회사에 정리해고 소문이 돈다. 옆 부서 동료가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아이고, 그 사람 어떡해." 진심으로 혀를 찬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작은 안도감이 스친다. 내 부서가 아니라서, 내 이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다.
만약 나이가 들어서도 예의가 없고 자신의 감정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참 불쌍한 사람이군!" 이럴 때도 쓸 수 있는 단어가 pity다.
Sympathy — Pity보다 깊지만, 여전히 마음만 아프다
Sympathy는 Pity보다 한 걸음 더 다가서서 상대를 좀 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그 고통이 내 몸으로 넘어오지는 않는다.
거래처 사장의 부친상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에 간다. 상주의 손을 잡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진심을 담아 위로한다. 부의금 봉투를 내고, 육개장 한 그릇을 먹으며 다른 문상객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집으로 돌아온다.집에 도착하면 나는 다시 평소의 나로 돌아간다. 밥이 잘 넘어가고, 밀린 드라마도 보고, 잠도 잘 잔다. 다음 날 아침이면 어제와 다름없는 내 하루가 시작된다.
Empathy — 상대방의 고통이 내 몸으로 전이되지만,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은 없다.
Empathy는 나와 상대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상대의 고통이 내 몸으로 전이된다. Pity, Sympathy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여기다. 이제 정말로 내 몸이 아프다.
나는 지난 글에서, 암과 싸우던 누이를 곁에서 지켜본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병상에 누워 눈물을 흘리는 누이를 볼 때, 나는 환자가 아니었지만 그 고통이 그대로 내 몸속으로 전이되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가슴속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이 바로 Empathy다.
그런데 Empathy는 딱 거기서 멈춘다. 고통을 느끼는 것과,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느끼는 데서 그치면 나 자신만 지쳐간다. 오래 돌봄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번아웃에 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께 아파하지만,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없을 때, 그것이 Empathy다.
Compassion — 상대방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동반되는 상태
Compassion은 어원상 Com(함께)과 Passion(고통받다)이 합쳐진 말이다. Empathy와 마찬가지로 내 몸이 상대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 Empathy가 고통을 느끼는 데서 끝난다면, Compassion은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실제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Compassion을 느낀 사람은 이미 상대방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되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치유할 때까지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본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해결이 안 되면 자신을 던져서라도 그 고통을 치유하려 한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전태일은 재봉틀 앞에서 하루 열네 시간씩 일하면서도 폐병으로 고생하는 어린 여공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꼈다.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관청과 언론을 찾아다니며 해결책을 찾았지만, 해결책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며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고통을 느끼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몸까지 던진 것이다.
나는 이렇게 compassion의 극단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전태일 열사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평범한 인간인 나는 어느 날은 pity를 가지고 살고, 어느 날은 sympathy 수준에서 살며, 어느 날은 empathy를 느끼며 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compassion 앞에서 늘 주저한다.
몸철학이 걸어야 할 궁극의 목적지가 compassion이라면, 나는 아직도 출발선에서 주저하는 인생이 아닌가?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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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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