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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하루 종일 시지프 신화를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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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시지프 신화를 생각하였다. 시지프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 신들은 헛되고 희망 없어 보이는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형벌을 시지프에게 주기 위해 큰 바위를 정상이 뾰족한 산 위에 올려두라고 명한다. 정상이 삼각뿔처럼 뾰족한 산 위에 큰 바위가 올려질 리가 없다. 바위는 자연히 정상에서 산 밑으로 굴러떨어지게 되어 있다. 시지프 신화 시지프는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쫓아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바윗돌을 산 위로 굴려 올려야 한다. 이 얼마나 헛되고 희망 없어 보이는 일인가? 나는 신들에게 형벌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시지프 처지와 어찌 이리도 비슷한가를 생각하였다. 나는 매일 아침 산 밑으로 내려와 바위를 산 정상에 올리기 위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다. 나의 돌은 주기가 하루이기도 하고 한 달이기도 하고 몇 년이기도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정상에 돌을 놓아본 적이 없다는 것은 시지프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형벌이다. 그렇다면 삶은 형벌인가? 시지프는 신의 형벌을 멋지게 뒤집는다. 그는 산 정상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쫓아 산 밑으로 내려가며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인간이 신에게 보내는 승리의 선언이다. 시지프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다시 산을 내려갈 때 신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나를 돌아보니 나도 죽을 때까지 제대로 성공 한번 못 해보고 삶을 마감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이제 준비를 할 것이다. 실패를 확인한 그 순간에, 씨익 미소를 지을 준비를 말이다. 그리고 다시 돌을 굴리고 다시 씨익 미소를 지을 것이다.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는 나 이외에 아무도 없다. 만약 실패의 순간에 내가 씨익 미소를 짓는다면 나는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인간으로서 운명을 넘어서는 멋진 순간이 될 것이다. 하루 종일 시지프의 행복을 생각하였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⑦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을 읽고 몸철학 드림

⑩ 30번씩 씹어라?

"오래 씹어라", "30번씩 씹어라" 이런 소리를 사람들은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건강을 위하여 아주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이고 심지어 자신은 실천하지 못하면서 남에게는 쉽게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왜 그래야 하는지, 오래 씹으면 무엇이 좋은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나의 경우, 십여 년 전에 나보다 10여 살 나이가 더 든 직장 상사가 실제 그 효과를 보여준 적이 있다. 그 분은 나와 사적인 이야기도 나누던 분이었는데 그 날은 삼 개월 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였다. 술도 많이 드시던 분이고 체구도 나보다 작고 흰 머리도 많으신 분이어서 평상시 건강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분인 줄 알았는데 그날은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 같아 내가 가볍게 물었던 것이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세요? 얼굴이 광채가 다 나는 것 같아요." 나의 가벼운 질문에 그분은 정색을 하며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밥을 먹을 때, 한 30번씩 씹어 먹기 시작한지, 3개월 정도 지났어. 그런데 소화가 잘 되어 몸이 너무 가볍고 혈색도 좋아졌지. 특별히 음식을 가려 먹은 것도 아니고 그냥 평상시대로 먹었는데, 달라진 것은 한 30번씩 씹어 먹기 시작했다는 거야." 그분은 그날 나에게 오래 씹어 먹기 시작하고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광채가 나는 얼굴로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나도 오래 씹어 먹어야겠구나 생각을 하였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다. 아무튼 퇴직 후 좀 더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씩 습관을 고쳐나가고 있는 지금, 왜 30번씩 씹어야 하는지 좀 더 과학적으로 알아보았다.  '30번'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왔을까 먼저 솔직히 말하면, "30번이 정답"이라고 못박은 단일 연구는 찾지 못했다. 학계에서도 "몇 번을 씹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본다. 다만 일본의 독성학자 니시오카 하지메 교수가 쓴 『씹을수록 건...

⑮ pity, symphathy, empathy, compassion의 차이를 알고 밀려 온 부끄러움

여러분은 Pity, Sympathy, Empathy, Compassion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는가? 나는 직업상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할 수밖에 없어서, 남들보다 좀 더 깊게 영어 단어의 의미를 공부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연민', '불쌍함', '동정', '측은지심' 등에 해당하는 이 네 단어의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사실 나는 영어가 장사를 할 때는 무척 유용하지만, 깊이 있는 사고를 할 때는 적합하지 않은 언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네 단어의 차이를 깨닫고 나서, 영어에 대한 그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 이 네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면 여러분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네 단어를 가르는 두 가지 기준 네 단어를 가르는 기준은 아래와 같이 딱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상대방의 고통을 내 몸으로 느끼는가? 내 몸으로 느끼지 못하면 pity, sympathy이고, 상대방의 고통이 내 몸의 고통처럼 느껴지면 empathy, compassion이 된다. 둘째, 그 고통이 해결될 때까지 실질적인 노력을 지속하는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empathy이고, 그런 노력을 하면 compassion이 된다.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단어 하나씩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다시 설명해보겠다. Pity — 안됐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Pity는 타인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 마음 속에는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문장 하나가 숨어 있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회사에 정리해고 소문이 돈다. 옆 부서 동료가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아이고, 그 사람 어떡해." 진심으로 혀를 찬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아주 작은 안도감이 스친다. 내 부서가 아니라서, 내 이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다. 만약 나이가 들어서도 예의가 없고 자신의 감정도 통...

⑭ 예수님이 남긴 가장 귀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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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 교회를 아주 열심히 다니던 고등학생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는 침례교회로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철야 예배를 하고 토요일 새벽에 집으로 귀가를 하곤 했다. 나는 교회 고등부 회장이었고 신약성서, 특히 4복음서에 매료되어 거의 매일 성서를 읽고 간혹 금요일 철야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 더 넓은 지식을 습득하면서도 일요일에 교회는 계속 다녔고 결혼 이후에는 시골 교회에서 좋은 분들을 만나 신실한 집사로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런 내가 왜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지는 이미 이전 글에서 소개를 하였다. 👉 이전 글 바로가기  ⑦ 로제타석이 나에게 던진 질문 그러나 내가 비록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지만, 내 가슴속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내가 존경하는 분이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이제 내가 존경하는 예수님에 대해 잠시 소개를 하려고 한다. 사람들마다 예수님의 많은 말씀들 중에 자신에게 가장 와닿는 말씀이 다를 것이지만 나는 철이 들면서 예수님의 말씀들 중에 가장 귀한 말씀을 꼽으라면 사람들과 좀 다른 말씀을 꼽았다. 사람들은 대개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과부의 동전 한 닢이 부자의 큰 헌금보다 귀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등등, 이런 주옥같은 말씀 중에서 하나를 고를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이 남긴 가장 귀한 말씀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래전에 그런 생각을 짧은 글로 적어 두었는데, 우선 그 글을 함께 읽어 보자. 예수님이 남긴 가장 귀한 말씀 예수님이 제자들과 밀밭을 걷고 있을 때 배가 고픈 제자들 중에 몇몇이 밀을 한 움큼씩 손으로 걷어 씹으며 걸었다 이를 보고 성경을 통째로 외우던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일을 한 제자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당시는 율법의 일획도 어길 수가 없던 시절이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⑬ 몸철학이란 무엇인가?

몸철학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대답을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몸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한다고......" 이 말은 뜬금없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몸이 아프다고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당연히 아파하는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런저런 방법을 써가며 하루속히 아픔을 치유하려고 애쓰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몸철학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일 수밖에 없다.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몸은 왜 병에 걸리는가를 많은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과 내 몸이 아플 때, 내 몸에 귀 기울이며 아픔을 치유해 가는 것은 전혀 다른 길이라 생각한다. 전자에는 내 몸과 아픔이 없고, 후자에는 내 몸과 아픔이 있다. 몸철학이 내 몸과 아픔으로 시작된다는 것은 왜 몸철학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일 수밖에 없는지 설명해준다. 내 몸이 아픈데 내가 어떻게 관념적인 상태로 있을 수 있는가? 내 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식단을 바꿔보고, 잠을 바꿔보고, 운동을 바꿔보고 — 그리고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다시 지켜보지 않겠는가? 그런 실천을 통해서만 몸의 아픔은 완화되고 몸의 문제는 해결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부모님과 병든 누이를 돌보러 횡성에 내려가 있는 동안 식단을 채소 위주로 바꾸었다. 채소가 몸에 좋다는 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앎은 아무 힘이 없었다. 직접 식단을 바꾸고 내 몸이 달라지는 걸 겪고 나서야, 비로소 그 앎은 내 것이 되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깨달음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배워 왔다. 진리를 알고, 도를 알고 그렇게 깨달음을 얻으면 도인이나 성인이 되는 줄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실천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는 것"이다. 👉 관련 글 읽어보기 ③ 깨달음이냐 실천이냐 몸에서 시작해 우주로 넓혀가는 것 몸철학이 '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려면, 몸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몸과 나누는 대화는 먼저 나의 정신과 ...

⑤ 외다리 외팔이 신문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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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나는 페이스북에 사진 한 장과 짧은 시 한 편을 올린 적이 있다. 최민식 사진작가의 '부산 1985'라는 작품이었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없는 청년이 남은 한 팔 가득 신문을 안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진이었다. 외다리 외팔이 신문팔이 그때 나는 그의 결핍을 보았다. 없는 팔과 없는 다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 결핍을 딛고 끝까지 살아남아 웃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지었다. 한 팔이 없으면 남은 한 팔로 한 다리가 없으면 남은 한 다리로 끝까지 살아남아서 웃어주기를 그래도 사는게 좋다고 말해주기를 그렇게 우리도 살아갈테니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사진을 다시 꺼내 본다. 그리고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본다. 그는 이미 웃고 있었다. 뒤늦게 발견한 엷은 미소 2006년 부산일보에 실린 한 칼럼에서, 이 사진 속 청년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한 사람의 기록을 읽었다. 글쓴이는 1980년대 중반 부산 중앙동의 한 출판사에서 근무하며 사무실 앞 육교를 하루 서너 번씩 건너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외다리 외팔이인 그 청년이 오른팔에 신문을 들고 오른다리로 펄쩍펄쩍 뛰어 육교를 건너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난간을 짚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던 자신과 달리, 청년은 "잠시의 주저도 없이" 전력으로 육교를 건너갔다. 글쓴이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전력투구의 문제였다. 발이 열 개라도 전력으로 가지 않는다면 전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의 게으른 걸음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대목은 그다음이다. 20년이 흐른 뒤, 글쓴이는 최민식의 사진으로 그 청년을 다시 마주한다. 육교 위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사진 속에는 있었다. 청년의 얼굴에 번져 있는, 여유 있는 엷은 미소였다. 실제로 그를 눈앞에서 본 사람도, 뛰어가는 몸짓의 절박함에 압도되어 그 얼굴의 미소까지는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사진이 되고 나서야, 시간이 멈추고 나서야...

⑫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최근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 글 하나를 읽었다. 1980년대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배우 주윤발의 이야기였다. 👉 아내한테 10만 원 용돈 받아 씁니다 돈보다 오래 남는 것 주윤발은 전 재산 8100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해 세상을 놀라게 한 배우다. 정작 본인은 자동차 한 대 없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니고, 한 달 용돈은 10만 원 남짓이며, 고장 난 노키아 휴대폰을 17년 동안 쓰다가 회사가 단종을 시킨 뒤에야 어쩔 수 없이 바꾸었다고 한다. (국내 언론에도 여러 차례 보도된 일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한 방송에 나와 "그 기부는 내가 아니라 아내가 결정한 것"이라며 "돈은 어차피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통장의 숫자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오래전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때 내가 다다른 결론은 '오늘 하루'였다. 당시 여러 가지 더 귀한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으나 나라는 사람의 한계로 '오늘 하루'보다 더 소중한 것을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가 나에게 허락한 것은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공간뿐이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공간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바로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었다 . 머리의 깨달음, 몸의 실천 그리고 일상의 삶 깨달음은 대개 머리에서 멈춘다. 오늘이 귀하다는 것을 알아도,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알아도, 다음 날이면 다시 통장의 숫자와 남들의 시선을 좇는 삶으로 돌아가곤 한다. 주윤발의 이야기가 남다른 것도 그 깨달음을 실제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설령 깨닫는다 해도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지 못...